당신에게 서강대학교는 무엇이요라고 묻는다면 대답하기가 쉽지 않을 것이다. 1978년에 입학할 때 나는 이 대학에 대하여 사실 아는 것이 별로 없었다. 외국 신부님들이 설립하였고 영어 입학시험이 좀 독특하다는 정도밖에 아는 것이 없었다. 어디에 위치하고 있는지도 몰랐고 어떤 교수님들이 재직하고 계신지는 더욱 알지 못하였다. 입시에서 국·영·수 세과목만 시험을 치른다는 사실이 서강대학교에 응시하게 된 유일한 이유였다. 당시의 예비고사 성적으로 볼 때 아마도 어렵지 않겠냐는 것이 고등학교 때 담임선생님의 걱정이었다.


서강대학교에서의 학부 4년은 매우 만족스러운 것이었다. 학교를 7년 정도 늦게 입학한 덕분에 연배가 비슷한 친구들이 많지 않았지만 학번 동기 동생들은 순수하였고 잘 따랐다. 경상계열을 택한 것은 먹고 살 길이 막막하였기 때문이지만 최종 전공으로 선택한 경제학은 매우 재미있었다. 아직도 경제학을 팔아서 밥 먹고 살고 있지만 재미있는 학문이라는 생각에는 변함이 없다. 그렇지만 학생 시절에 가장 기억에 남는 것은 연일 계속하던 폭음이다. 지금 생각해도 어떻게 그렇게까지 마셔댈 수 있었는지 아찔하기만 하다.


내가 서강대학교 입학할 때 한 학년 학생 수는 660명 정도였던 것으로 기억한다. 내 학번은 78641이다. 사립문같이 엉성한 정문을 지나 사제관 쪽으로 오르면 오른쪽으로는 지금은 체육관이 자리한 계곡에 목공소가 자리하고 있었고 캠퍼스라고 건물도 별로 없는 것이 뭔가 어설프기만 한 풍경이 좋았다. 로욜라 도서관에서 바라보면 여의도가 훤히 보였고 건물 사이로 빼꼼이 보이는 한강 또한 정겨웠다. 초여름이 되면 지금 다산관 자리에 서있던 키 큰 아카시아 나무에 매달리던 꽃과 향기를 잊을 수 없다.


서강대학교 경제학과에 교수로 부임한 것은 1994년이다. 8년 만에 돌아온 것이다. 지금은 무척 후회하고 있지만 당시에는 모교에 돌아가는 것이 꿈이었다. 은사님들로 층층시하인 학과에 뭐 좋다고 그렇게 돌아오고 싶어 했는지 지금은 이해가 되지 않지만 당시에는 행복했다. 학생들 가르치는 것도 좋았고 그 동안 마시지 못했던 소주 맛은 달았다. 그러나 모교에 재직하는 사람의 괴로움을 알기에는 많은 시간이 필요하지 않았다. 학교가 잘 된다고 느껴질 때는 더 없이 행복했지만 뭔가 잘못 나아가고 있다고 생각될 때는 그보다 마음 아플 수가 없었다.


그런 가운데 환갑이 지나고 은퇴가 멀지 않았다. 지금까지 내 인생의 반을 이런 저런 인연으로 서강대학교와 섞이면서 살았다. 아무도 나에게 물어준 적이 없지만 당신에게 서강대학교란 무엇이요라고 묻는다면 어떤 대답을 내어 놓을 수 있을까를 생각해 본다. 좋든 싫든 나는 이제 서강대학교의 일부가 되어 있다는 생각을 하지 않을 수가 없다. 내가 이 학교에 도움이 되고 있든 아니든 이제는 서강대학교의 모든 좋은 점과 나쁜 점에 나의 어떤 것들이 기여하고 있음을 통감하지 않을수 없다.


그 많은 인연을 통해 나는 이제 서강대학교의 어떤 것이 되어 있는 것이다. 나의 몸과 마음과 태도에서, 그리고 정신과 영혼에서 서강대학교를 지울 수 없다는 것이 한편으로는 절망이지만 다른 한편으로는 행복이다. 이런 절망과 행복을 함께 나눌 수 있는 후배와 제자들이 다시 들어왔다. 봄보다 따뜻한 마음으로 환영한다.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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Posted by nervoushideoutduck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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